인정만으도 배부른 집, 대전 성심당 임영진 대표

“젊은 직원들게 김탁구 보 하죠, 빵 만드는 신 배우라고요 모두들 퇴근한 팔봉 제빵실. 군가가 홀로 오븐 속에 반죽을 넣고 빵을 꺼내길 반복한다.

새까맣게 타고 한쪽이 찌그러 량 빵만 나와도 포기란 없다. 땀에 젖은 모 안쪽엔 이런 글 새겨졌.

‘제빵왕 김탁구’. 1974년, 학생 임영진은 아버지의 빵집 ‘성심당’의 오븐 앞에 처음 섰다. 다섯 명뿐인 직원이 “가불해 주지 않는다 집단으로 파업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 보기만 했던 빵 굽는 일. 정작 손에 밀가루를 묻혀 굽자니 무척 불안했다.

200도 워야 하는 롤 크. 빤히 알면서도 나 탈까봐 걱정스러워 150도에 구웠다. 종이처럼 뻣뻣해진 롤 케이크는 말지 . 에 나지 않고 몰입다. 36 지난 2010년 재, 임영진씨는 성심당 대표로 여전히 븐 앞을 지키고 있다.
성심당은 전의 랜드 집이다. 상를 잊었다면 “따끈한 빵을 무제한 식할 수 있는 곳” 아니면 “그날 팔다 남은 빵 모두 하 곳”을 물으면 누구나 대전역 앞 으 리의 심으 다. 성당은 점포 한 곳의 매출이 연 60억원.

하루 균 1500원 이상의 매상 . 요즘 잘나가는 대기의 유명 랜차이즈 커리 브랜드도 씬 게 제압했.

드라마 제왕 김탁구’ 속 탁는 빵 스승인 팔봉 선생에게 이렇 묻는다. “할배, 리 메가 세 결국 착한 사람 이기는 라던데 이 니꺼?”그 대답을 현실 속 ‘제빵왕 임영진’ 대표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
● ‘성심당’의 시작은 어땠나요.
1956년 대전역 앞에서 연 ‘찐빵집’ 성심당.
“아버지(고 길)가 1956년 작 찐집으로 시작했어요. 5년이 지나고서야 제과점 형태를 갖췄고요. 처음 차렸을 때부터 그날그날 남은 찐빵은 배고픈 이웃들에게 나눠줬어요. 화제였죠.

지금과 달리 그 시절 음식은 생명을 상징했으니까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며 감사했기 때문이에요.
아버지는 함북 함주 고향데 1950년 흥남 철수 때 마지막 배(메러스 빅토리호로 피란민 1만4000명을 태워 철수)에 가������스 . 그리고 6 대전역 에 작 차렸다.
대학교 1년 , 직의 업 일손이 모자라 빵 일에 뛰어들었어요. 처음엔 어려웠지만 빵의 미묘한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반죽법과 발효상태에 따라 천의 얼굴을 했으니까요.”
● 36년 만든 제품 중 최고 히트상품은 뭔가요.
성심당 운 일 공신 세 있습니다. 1980년 ���시��� 튀김소보로가 그중 하나죠. ‘내가 아하는 빵들의 장점을 합쳐보면 어��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단�����빵 속 달콤한 팥, 소보로빵 바삭한 껍질, 찹쌀 도넛 을 합쳐 ‘튀김보로를 만.

신 빵이 나왔다”며 손님들이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섰어요. 원래는 빵이 ����면 마지막에 초콜릿시럽을 끼얹������ ���������하��고 ��는데, 식기 전에 다들 집어는 바람에 초콜릿시���은 한 번도 못 써봤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대로 팔고 있죠. 
● 나머지 대표 상품도 궁금하네요.
82��� ��������� 신혼여행 ���� 후�������오카의 ‘몽블랑’ 빵집에서 새로운 케이크를 봤어요. 당��������� 우리나라엔 딱딱하고 느끼한 버터크림 케이크뿐이었는데 그��에서 본 생크림 케이크는 부드러우면서 달지도 않아 충격이었죠.

당장 생크림 케이크 만드는 법�� 배워 와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했������. 15일을 진열��������������도 끄떡없던 버터크림 케이크와는 달�� 생크림은 ��루�� ����겨도 상했죠. 고민 끝에 ������이크 시트만 미리 만들어 놓고 주문 즉시 손님 앞에서 생크림을 올렸어요.

손님들이 몰려 서서 구경했죠. 생크림 짜는 데 3분이 걸려 ‘3분 케이크’라는 이름을 붙였고, 신기한 케이크라고 입소��������� 났어요. ��지막은 포����빙수입니다. 85년에 개발했는��� 당시엔 테이크 아웃의 개념이 없었어요.

여름이면 어르신들은 양은냄비를 가져와 빙수를 ��아 갔어요. ‘더 편하게 먹게 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 병원에서 링거 감쌀 때 쓰는 스티로폼이 떠올랐죠. ��티로폼 통을 ��들�� 빙수 봉지를 넣고 뙤약볕을 걸어다녔어요. 철봉에도 매달아 놓고. 3시간이 지나도 안 녹고 그대로더라고요. ‘3시간 빙수��라고 이름 붙였죠.

당시 대��� 사람들은 서울 갈 때 포장빙수를 일부러 들고 갔어요. “서울에도 없는 게 대전에 있다”며 자랑했죠.”
● 어려움도 많았겠습니다.
“그럼요. 빵을 기부하는 것조차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은 빵 가지고 생색낸다’부터 ‘썩은 빵 아니냐’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건 1987년 6·10항쟁 때예요. 성심당 바로 맞은편이 주교좌 성당인데 당시 주교좌 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같은 역할을 했어요.

시위 때면 빵집 주변까지 온통 마비돼 빵을 못 팔았어요. 그날도 빵이 몽땅 남은 날이었어요. 학생과 전경은 서로 악에 받쳐 있었죠. 저희는 양쪽 모두에게 빵을 나눠줬어요.

굶주린 학생들도 안쓰러웠고, 전경들도 따지고 보면 학생들과 같은 나이인데 마음이 아팠거든요. 그런데 결국 학생들에게 빵을 나눠준 것 때문에 경찰서에 끌려갔어요.

‘부정식품 판다’는 누명을 쓰고서요. 경찰서에선 부정식품이란 증거가 없자 보건 연구기관에 의뢰했어요. 검찰에까지 올라갔는데 혐의가 없으니 결국 검찰에서 ‘무고하다’는 결과가 나왔죠.”
● 모든 비즈니스엔 라이벌이 있게 마련인데요.
“요즘 동네 빵집, 일명 ‘윈도 베이커리’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대자본의 프랜차이즈 제과점 때문이죠. 성심당 옆에도 92년 서울 강남의 ‘뉴욕제과’ 체인이 들어왔다 2년 만에 철수했어요. 그 후로 다른 프랜차이즈는 들어올 시도를 안 해요.

사실 규모와 자본으로 치면 저희가 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을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가장 성심당다운 강점이 뭔지. 답은 ‘갓 나온 신선하고 따끈한 빵’과 ‘동네 빵집만의 푸근함’이었어요.

냉동 생지를 공급받는 게 아니라 저희가 직접 반죽한 생지를 써서 그 자리에서 구워내잖아요.
● 무제 빵 시식은 어떻게 나온 아이디어 인가요.
일단 빵이 나오면 종을 크게 치 . 고 끈한 빵 님들에게 마음껏 먹도록 해요. 간혹 직원들이 “아깝다”며 시식에 한 자 해요. 식 해한 는 손님도 많거든요. 하지만 박하게 구�� 순간 동네 빵집이 가진 매력은 사라져요.

저희 집 빵들은 이나 지금이 큼지. ‘유행에 맞게 작고 예쁘게 만들’ 흔들린 적도 있지만 성심당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날 팔고 남은 빵은 모두 기부하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기부하는 빵을 액수로 치면 한 1000만원 정도 돼요. 매주 일요일 대전역 노숙자들에게 빵 250개를 선물할 땐 모자라서 새로 만들어 가고요. “음 반값에 팔면 500만원이라도 남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500만원보다는 사랑을 나누는 가치가 더 크다고 믿어요. 게 저희의 요.

감사하게도 둘 다 성심당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됐어요. 무제한 시식 때문에 빵집이 항상 붐비니 궁금한 마음에 더 찾고, 남은 빵을 기증하는 게 알려지며 ‘성심당은 남은 빵 안 판다’는 소문이 났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인기가 영향을 미치나요?
“단팥빵·소보로빵·크림빵의 매출이 2배씩 늘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한 빵들이죠. 질문도 많이 받아요. 구일중(김탁구의 친아버지이자 제빵의 달인)이 빵 만들기 전 두 팔을 벌린 채 손가을 직이아요.

‘실제로도 그렇게 하느냐’고 손님들이 묻는데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온도와 습도를 재는 모습을 극대화해 표현했다고 봐요. 그 시절(1970∼80년대)엔 시설이 지금 같지 않아 온도 하나, 습도 하나에도 세심히 신경썼어요.

같은 반죽이라도 온도와 습도에 따라 전혀 다른 빵이 되거든요. 젊은 직원들에겐 꼭 챙겨 보라고 해요. 레시로만 빵을 배운 요즘 사람들이 제빵의 기본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죠.”
● 궁극적 목표는?
“중국에 1년이 400여 빵인이 찾아니다. 오면 기술부터 배우려고 하. 정 알려주 은 건 따로 있어요. ‘남을 밟지 않으면서도 성공할 있다’ 예요.

성심당 사훈이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 주인만 좋아서도, 손님만 좋아서도 안 돼요. 원들까지도 좋아야 합니다. 성심당엔‘한가족신문’이란 게 있어요. 일주 동안 자기에게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공동 블로그에 올리고, 월요 회의시간엔 그 블로그를 바탕으로 신문을 만들어요.

직원 한 명 한 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죠. 지난달 한 직원이 사망했을 때 다른 직원들이 그 친구를 위한 추모신문을 만들었어요. 함께 찍은 사진을 모으고 편지를 썼는데 30장이 넘었죠. 가슴이 찡했어요.

저희는 빵을 통해 세상을 변화키고 있어요. 임영은 은 사람 명일 뿐이고 성심당 역시 지구 밖에선 점 하나도 되 곳이죠.

하지만 빵으로 사랑을 나눔으로써 성심당이 ���전을 변화시키고, 저를 찾은 제 자 도시에 또 다른 성심당을 들어 간다면, 언젠는 사랑이 득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Source: http://news.joins.com/article/143/4383143.html?ctg=1200&cloc=home|showcase|m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