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이나 찍는 인쇄쟁이? 예술이죠, 예술"

인쇄공장을 갤러리처럼 근대 유럽 포스터展 여는 서명현씨
3D업종 천대받는 게 싫어 희귀 석판화 포스터 수집 930만원 주고 구해오기도 "사람들에게 '인쇄업한다'고 얘기하면 대개 '명함이나 좀 찍어달라'고 해요. 만약 제가 철강사업을 했다면 그들이 '철판이나 한 장 달라'고 했을까요?"
26년간 '인쇄업자'로 일해온 서명현 (52) 태신인팩 대표가 그간 수집한 근대 유럽 석판화 포스터로 2일 서울 인사동 목인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는 15일까지 계속된다. 태신인팩은 화장품의약품을 담는 종이박스나 쇼핑백캘린더 등을 만든다.
▲ 서명현 대표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포스터들 앞에서 익살스러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인쇄업이 3D업종으로 천대받는 게 싫었다. 공장에 복제품이 아닌 진짜 예술품을 놓아 문화의 향기를 불어넣고 싶었다"는 게 이번 전시를 갖게 된 계기다. 서 대표는 "기계로 인쇄물을 찍어내고 있지만 나의 정신적 지향점은 상업 포스터에 예술혼을 담아낸 근대 유럽의 석판화 포스터 제작자들과 닮아 있다"고 했다.
그가 근대 유럽 포스터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것은 7~8년 전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영범씨로부터 석판화 포스터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매년 가을 프랑스 니스에서 열리는 포장전시회에 갈 때마다 벼룩시장을 뒤져 포스터를 모았다. "프랑스 화가 아쉴르 모장이 1922년 그린 술 광고는 소장자를 세 번이나 찾아가 설득해 6000유로(약 930만원)를 주고 겨우 손에 넣었어요. 200장밖에 찍지 않은 희귀본이거든요. 말년을 니스에서 보낸 마티스가 도안하고 친필 사인을 남긴 니스 홍보 포스터도 소장자 부인이 내놓기 싫어했는데, 4000유로(약 620만원)에 겨우 구했죠."
이번 전시에는 그가 수집한 포스터 80여점 가운데 30여점이 나온다. 수영복 차림 여인의 모습이 고혹적인 몬테카를로 홍보물, 사탕 광고, 1935년 프랑스 칸의 호텔에서 열린 디너쇼 홍보물 등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포스터들이다.
"책이나 사보(社報)를 인쇄하면 식자층에 속한 분들이 와서 교정을 봐요. 그 앞에서 기름때 묻고 너저분한 공장 안, 다 떨어진 '난닝구' 입고 슬리퍼 찍찍 끌면서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보이는 게 창피했어요."
열등감에서 시작했지만, 그의 컬렉션 이력과 열정은 상당하다. 광운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가업을 물려받은 서 대표는 1980년대 말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갤러리를 방불케 하는 그의 공장에는 피카소 판화, 로버트 인디애나(팝아티스트)의 태피스트리, 크리스토(대지예술가)의 작품 사진 등이 벽면과 복도를 장식하고 있다. 요즘은 고대 인도와 네팔의 옷감 문양판에도 '꽂혀'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03/20110303000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