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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hms, Johannes (1833.5.7~1897.4.3) 독일

고전 형식에 신선한 예술미와 뛰어난 새로운 기교를 융합하여 절대음악에 정진한 브람스는 온후하고 독실한 인격을 지닌 작곡가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브람스는 코셀과 마르크스젠으로부터는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바하와 베토벤에게서는 고전적인 형식을 이어 받았고, 바하에게서는 다성적인 요소를 배워 고금에 비할 수 없는 명작들을 남겼다. 

브람스는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여 20세 때에는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정치적 망영으로 독일에 있었다) 와 연주회를 가졌었다.

브람스는 레메니와 여행하면서 유명한 음악가들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하노버에서는 오아힘을 만났고, 바이마르에서는 리스트를 방문했으나 실망했으며, 뒤셀도르프에서는 슈만과 교우를 맺었다. 슈만은 그가 발간하는 음악잡지에 브람스를 크게 소개하여 브람스의 음악적인 천분을 인정하여 결과적으로는 슈만의 가장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다.

1860년에 그는 선배들이 활약하던 빈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신고전악파"라 불리울 만큼 절대음악에 온갖 힘을 경주한 작곡가였다. 그야말로 19세기에 있어서 최후의 고전적인 작곡가로 추앙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4개의 교향곡은 그의 작품 중 가장 비중이 크다. 그 외에도 오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그의 가곡은 슈만의 뒤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가곡은 철두철미하게 낭만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낭만음악 시대의 인물인 만큼 기악곡에 있어서도 뼈대는 고전형식을 취했지만 낭만적인 정서가 풍부하게 깃들여 있는 것 같다.

 

브람스의 예술과 생애

브라암스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1833∼1897)는 1833년 5월 7일, 아파트의 좁은 방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부친은 27세였고 모친은 44세였다. 브람스의 음악을 말하려면 역시 부모님에 대해 조금은 언급해야 할 것이다.

 

부친 요한 야콥은 몽상가였는데 가업으로 이어온 여관 경영 계승을 싫어해 하이데라는 작은 도시를 뛰쳐나와 함부르크에서 살게 되었다. 음악가를 지망했던 요한 야콥은 항구 근처 술집의 밴드맨으로서 호르니스트로 활동하다가 바빌리온의 6중주 단원이 되어 모차르트, 베토벤의 명곡을 쉽게 편곡한 것을 연주하였다.

 

철물점에 하숙하고 있었던 그는 같은 하숙집에 묵고 있는 자매의 언니와 친하게 되었고 일주일만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신랑은 24세, 신부는 한쪽 눈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혼기를 놓쳐버린 17세 연상의 여인이었다.

 

이들의 결혼이 이루어진 1830년 당시로서도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연령 차이였다. 유년 시절에서 청년기로 이어지는 때의 요하네스 브람스는 부모의 이러한 처지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상황은 그에게 남녀간의 문제 의식에 관한 점만은 확실히 심어준 것 같다.

 

왜냐하면 클라라 슈만과의 관계, 많은 연애, 그리고 고독을 선택한 브람스의 일생이 부모님의 불균형적인 연령 차이 등은 그의 부모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는 의견이 많기 때문이다.

브람스의 음악을 말할 때면 언제나 논하게 되는 양면성 즉, 명과 암, 희망과 절망, 엄격함과 온유함, 그러한 극단적인 두 개의 정서가 교차되어 매력을 낳게 되는 원인의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초기 음악은 베토벤의 영향, 점차 브람스 음악화  브람스가 출생한 그 해는 베토벤이 빈에서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되었다. 또한 바그너가 작곡가의 첫 발을 내딛고 "교향곡 다장조"를 프라하에서 초연한 1년 후의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멘델스존, 슈만에 의하여 낭만파 음악의 새로운 물결이 크고 힘차게 신선한 음향을 그려내고 있을 시기였다.

 

브람스는 호른 주자이며 콘트라베이스 주자이기도 한 부친에게 음악의 초보를 공부했다. 다행스럽게도 부친은 자기 아들의 특별한 능력을 간파할 정도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부친은 자기 스스로 아들의 능력을 감당할 수 없다고 이식하고 거리의 음악 교사에게 데리고 갔다. 7세부터 10세까지는 오토 코셀, 15세까지는 에두아르트 마르크스젠에게 음악을 배우게 됐다. 이 두 스승의 교육에 의해 브람스는 '브람스적'인 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기초를 모두 그의 머리 속에 받아들였다.

 

브람스는 바흐에 대한 지식을 첫 스승에게, 베토벤의 위대함은 두 번째 스승에게 배웠다.

 

그가 베토벤의 사고방식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그의 초기 피아노 소나타 속에 베토벤의 영향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동시에 그는 베토벤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작곡가였다. 브람스는 베토벤적인 사고 방식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바흐나 쉬츠 쪽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의 작품의 양식적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음악보다는 바흐나 쉬츠의 음악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프로테스탄트계의 작곡가였던 그가 쉬츠나 바흐로 이어지는 프로테스탄트 독일 음악의 계보를 이은 셈이다. 즉 가톨릭계 작곡가인 베토벤과는 서로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종교적인 색채가 깃든 브람스, 베토벤, 바흐라는 대작곡가들은 큰 유럽의 정신의 공통적 기반 위에 있었다고 파악된다.

 

또한 브람스는 음악과 관련되는 예술 전반에 대해서도 베토벤과 바흐의 지식을 배운 스승들에게서 배웠으며 그것이 음악의 기술적인 것보다는 브람스가 작곡가로서의 방향을 결정짓게 했다.

 

낭만파 음악 최전성기에 등장했으면서도 그 물결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을 개척해 나간 능력은 두 스승의 좋은 지도덕택이었다.

 

서정성, 옷을 입지 않은 적나라한 모습으로 반영(브람스와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브람스하면 떠오른 또 하나의 작곡가는 바그너이다. 일반적으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의 관계는 본인들의 의식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 양상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바그너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오페라 등을 잘 보러 다녔다. 다만 창작 기법상 서로 다른 문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내면적으로 바그너를 의식했던 것이다.

 

영원한 숙적한 시대를 살다 간 천재는 있어도, 일찍이 두 사람의 천재가 동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재능을 불태웠던 일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브람스보다 20살이나 연상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연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브레스덴과 바이로이트로 이주해 활약하면서 평생을 음악극 작곡에 몰두하다가 아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숙명적인 겨룸을 했어야 했는지는 그들의 음악노선을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슈로 등장한 것이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였고,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으나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갔던 것이다. 

 

'개혁'의 바그너에 대항한 브람스의 '보수'독일의 음악계가 이렇듯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음악계에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하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바그너를 후원했던 인물이 리스트였지만, 브람스는 슈만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고, 영향을 받은 음악인의 성향에 두 사람이 굳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브람스를 혹평했던 바그너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때 바그너가 살았던 하디크가세 72번지에서 그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헨델의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다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르로 없을 것'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같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하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증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호의적이엇던 바그너가 왜 그 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여성 편력에 있어선 같았던 두 숙적 당시 브람스는 비인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비인에서 공연하기로 77회나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꿔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비인에서 모짜르트, 슈베르트, 베토벤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걱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가 한스 폰 뷜로우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 가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유럽 음악계의 양분화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그에 비해 바그너는 다혈질에다가 오만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의 지지파와 바그너의 지지파로 나뉘어진 것이다. 브람스의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로우,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슽느 요아힘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를 필두로 니체, 쇼펜하워, 마이어베르등의 인물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스 폰 뷔로우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종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었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가 함께 사랑한 여인은 베젠동크 부인이었다 이 여인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전하며 경쟁을 했지만 결국은 무위로 끝났고, 또하나의 상처가 각각의 가슴에 남았던 것이다.

숱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안을 수 없었던 브람스는 고독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모두 가슴에 안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했던 바그너 역시 그의 삶에서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토록 치열했던 음악혼은 설혹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지언정 결코 실패였다고는 그 아무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승인 거장 슈만의 죽음-'죽음과 부활' 영원한 테마 고무의 계기브람스의 전기나 이야기를 쓰는 작가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는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와의 관계이다. 남녀의 애정과 정신과 육체의 분리에 관해 유럽인, 특히 그 중에서도 독일인은 분명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브람스의 경우 독일인의 상식으로는 판단되니 않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창작의 초안을 클라라에게 보여준 후 그 의견을 듣고 나서 초연을 했고 출판도 했다는 사실이 엄연하게 남아서 전해지고 있는 이상 그의 음악을 듣고 즐기는 우리들로서는 클라라의 존재를 무시할 수가 없다.

 

브람스의 생애를 더듬어 갈 때, 그의 인생 선택은 항상 내면의 정열(금색 빛)을 이성이라는 테두리(그을린 은)로 굳혀서 걸어왔다. 바로 감정의 격류를 형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한정시킨 신고정주의 작곡가의 삶이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자신을 억제하고 학대해야 했던가. 사람은 날 때부터의 기질에 덧붙여서 인생의 매듭매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벤트로 인생관이 수정된다. 부친에게서 음악적 재능을, 모친에게서 성실한 성격을 계승한 브람스는 코세르, 마르크스젠이라는 유능하고 다정한 스승에 의해 재능을 갈고 닦아 심성이 풍부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학교 교율속에서 자라난 경건한 신앙과 애국심은 그의 중심에서 평생동안 불탔으며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 분방했을 10대의 마지막에 이르러 자기비판 때문에 작품을 찢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던 청년, 언제나 자신에게 엄격했던 그도 주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외로 정다웠다. 브람스는 편생토록 그러한 자세로 일관했던 사람이다.

 

1853년 9월 30일, 친구 요아힘(바이올리니스트, 하노바 관현악단 콘서트 마스터)의 권유로 뒤셀도르프의 로베르트 슈만 가의 현관에서 섰던 일이 브람스의 인생을 크게 바꿍어 놓았다. 바꾸었다기 보다는 상상할 수 없다는 인생의 출발점이었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슈만은 젊은 인재가 나타난 것을 기뻐하며 한달 동안 그를 가족 속에 두고 그의 작품을 듣고는 '천재다!'를 연발했다. 존경하는 거장 슈만, 그의 아내 클라라, 그리고 여섯 아이들과 슈만 가를 방문하는 젊은 동료음악가들과 함께 지냈다. 무엇보다도 재능이 풍부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스스로의 마음을 일심으로 부정하면서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모의 정은 날이 갈수록 싶어만 간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 소나타 작품 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 전념하는 브람스였다.

 

1856년 슈만이 사망한다. 클라라에게 있어서는 인생 최대의 슬픈 날이었고, 브람스에게는 정신적 지주와 족쇄(?)를 종시에 잃어버린 망연자실의 날이었다. 슈만의 죽음에 의하여 유발되었다고 하는 작품 「매장의 노래 작품 13」이 탄생한다. 미하엘 바이세의 힘찬 독일어 텍스트에 의해 '죽음과 부활'이라는 영원한 테마에 고무된 브람스는 루터파의 코랄을 바탕 삼아 관악기와 팀파니의 반주를 덧붙인 혼성 5성부 합창으로 만들었다. 또한 슈만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무반주 혼성 합창곡 「2개의 모테트 작품 29」는 코랄 선율을 정성들인 푸가를 이루는 아름다운 곡으로, 신의 자비에 매달려 신의 위로를 구한다는 브람스의 사상이 뚜렷하게 부각된 작품이다. 그리고 독 낭만과 종교 음악의 최고 걸작 「독일 레퀴엠」은 분명히 이 두곡의 연장선상에 온다고 말할 수 있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에서 성서의 세계로

클라라 슈만브람스, 그 마음의 궤적

브람스의 음악을 논할 때 많은 사람이 즐겨 사용하고 싶어하고, 또 사용해 온 표현은 '표면을 그을린 은(銀)과 같은…'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브람스의 중후한 음색은 '그을린 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찰나적 금빛으로 빛나는 음의 빛깔 또한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19세기 종교음악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그의 '독일 레퀴엠'(작품 45), 만년의 가곡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등 '그을린 은'의 대표적 작품이랄 수 있는 것에서조차 그 한편엔 빛나는 금빛의 음색이 돋보인다.

 

슈만과의 만남으로 인해 필연적인 만남이있었다. 슈만의 충실한 아내이자 여서 아이들의 엄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능이 풍부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브람스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지만, 1853년 2월,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간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을 기울이게 된다. 6명의 아이들을 안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작품 8)을 들려주고 이윽고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작품 9)을 작곡한다. 일상에서는 클라라를 도와 아이들을 돌보아주며 그녀에게 라인강변의 산책을 권유하기도 했다.

 

클라라를 잠시라도 곤경에서 구하고 싶고 생기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브람스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슈만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되새기곤 했다. 그런 브람스에게도 가곡 창작이라는 자신의 진심을 그대로 토로할 수 있는 독자적인 소우주가 있었다. 마음의 일기라 할 수 있는 가곡의 창작(작품 3, 6등)에는 사랑하는 이의 감미로움과 그 사랑의 비애, 끈기있는 사랑의 힘이 시인의 언어를 빌어 절실하게 투영되어 있다.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로

 

1855년 가을에 클라라, 요아힘, 브람스 등 세 사람의 합동연주회를 각지에서 개최하여 슈만일가의 생계를 돕기도 한 브람스는 당시 부인보다 14살 연하인 22살의 청년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에 편지의 교환이 시작된다. 그후 40년에 걸친 음악사상 보기드문 우정의 편지가 오고간다. 호칭은 '경애하는 부인'에서 '나의 클라라에게', 경칭의 '부인'(Sie)에서 친밀한 표현인 '당신'(Du)으로 변화해 가지만, 또한 '사랑하는 친구여'라고 우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애처롭게 담겨져 있다. 이 편지들에서 드러나는 것은 현실세계 속에서 클라라를 연모하는 브람스와 현실도피의 차원에서 브람스를 생각하는 클라라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사랑을 꿈꾼 브람스에게는 클라라를 연모하면 할수록 '사랑해서는 안되는 여성을 사랑하고 말았다.'는 정신적 고뇌가 커싿. 클라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창작의욕까지 점차 꺾여나갔다. 시작했던 자곡도 도중에 그만두고 대위법 학습니라는 자신에게 부과된 일에 채찍을 가해야만 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1856년 7월 29일 슈만 사망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 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오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 커갔다.

 

그런 중에 그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 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념'(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무렵 슈만의 죽음으로 유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매장의 노래'(작품 13)이다. 미하엘 바이세의 강렬한 독일어텍스트를 보고 '죽음과 부활'이란 영원한 테마에 사라잡힌 브람스는 루터파의 코랄(Choral)에 기초하여 관악기와 침파니의 반주를 더한 혼성 5부합창을 마무리했다. 또한 슈만의 죽음과 관련있다고하는 무반주 혼성합창곡 '2개의 모테트'(작품 29)는 코랄 선율이 밀도있는 푸가로 형상화된 아름다운 곡으로서 신의 자비에 의지하고 신에게 위안을 구한다는 브람스의 사상이 확연히 드러난 작품이다. 그리고 독일 낭만파 종교음악의 최고 걸작 '독일 레퀴엠'은 확실히 이 두 곡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 - 이것이야말로 긴 세월 동안 브람스의 뇌리와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테마였다. 슈만의 사후 10년간 갈등을 계속했던 테마의 결실, 그것이 '독일 레퀴엠'이었던 것이다. 성서를 항상 곁에 두고 애독했던 프로테스탄트, 브람스. 그는 '현세에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가톨릭의 그것과는 다르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즉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객관적인 것이고 최후의 심판이란 부활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짐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었다. 남겨짐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하여 그 생존자들에게 성서의 말을 빌어 위안을 주고자 한 것이 그의 레퀴엠이었다.

 

슈만의 죽음, 모친의 죽음, 그리고 많은 이웃들의 죽음과 만난 브람스는 독일인으로서 루터의 독일어 성서 속에서 신앙의 원천을 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시구(時句)를 선택했던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걸어온 종교생활과 종교관 그리고 클라라를 사모하는 인간 브람스의 숨김없이 진솔한 모습이 거기에 투영되는 것이었다.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독일 레퀴엠'을 산출한 브람스의 신앙심은 인생의 어떠한 고난도 음악으로 변용할 수 있는 신이 주신 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서에서 구한 4개의 가곡 헌정

클라라를 사모하며 돌보는 일로 평생을 독신으로 산 브람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영성이 없었을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개성도 클라라와 떨리지게 할 수는 없었다. 클라라만이 평생 브람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인간의 마음의 변천-인생의 다양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떳게 걸어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해 명백해지는 것이지만 창작가로서의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 가장 만년의 종교가곡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121)를 통해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전부를 쏟아넣은 '유언장'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졸증으로 쓰러지자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으로 이 4개의 가곡을 만들어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을 실었다.

 

전체적인 켁스트를 성서에서 구한 이 4개 가곡의 제1곡은 인생은 동물의 삶과 같이 공허한 것이나 그 유일한 구제는 일에 힘쓰는데 있다는 인생의 의미를 노래했으며, 제2곡에서는 죽음으로 고통을 면제받은 자의 행복을,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모르는 자를 찬양한다.

 

제3곡에서는 행복한 인생을 걸어온 자에게 닥쳐온 죽음의 괴로움과 불행한 인행을 걸어온 자에게 닥쳐온 죽음의 기쁨을 대조적으로 노래하고, 제4곡에서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영원함을 설명,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신앙에도 우선하는 가치임을 유장히 노래하고 있다. 이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럼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썯아졌다. 사는 것을 항상 신중히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실현할 수 없었던 그 인생의 정열은 작품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었으며 개인을 초원한 힘이 되어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브람스의 마음이 걸었던 발자취는 클라라 슈만이 중심이 된 사랑으로부터 승화하여 성서의 세계로 옮겨갔던 것이다.

 

 브람스의 마지막 생(生)

브람스의 죽음클라라를 생각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브람스. 물론 긴 인생 가운데 어슴푸레한 연정의 향기를 풍겼던 여성도 없지 않았지만, 결국 어떤 개성도 클라라가 될 수는 없었다. 클라라만의 브람스의 마음 속에 평생토록 계속 존재했던 여성이었다.

 

그 중에서도 바드이슈에서 쓴 말년의 음악 속에 흐르는 아름다운 정감, 그 속에서 작곡가가 조용하게 말해주는 부드러운 '브람스적인' 분위기를 맛볼 때 청년 시절의 동경이 선율에 어우러져 아름답게 수놓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역시 클라라의 존재 없이는 탕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896년 브람스는 봄볕 따스한 바드이슐에서 클라라가 뇌졸증 발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친구들을 통해 죽음 뒤에 전해진 이 소식은 브람스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주었다. 인간 마음의 변천,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어떤 모양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걸어갔는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에 의하여 명확하게 나타난다. 창작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7일 완성하였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20세에서 64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태반을 지내는 동안 브람스의 마음을 차지했던 것은 클라라의 존재였다. 거기서, 생겨나는 힘의 모든 것 에너지의 전부를 창작에 쏟았다. 삶을 진진하게 생각하고 인생을 서투르게 살 수 없었던 그의 인생몽상은 작품 속에서만 실현되었고, 개인을 초원한 능력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감명과 감화를 주고 있다.

 

브람스 마음 궤적은 클라라 슈만을 축으로 삼고, 사랑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람스의 음악사적 위치

전 생애 통해 실내악 양식 표현 확립1850년대부터 시작되는 브람스의 창작 제1기는 주로 실내악 창작을 비롯, 1854년부터 1894년까지 40여 년간에 걸쳐 24곡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 속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피아노 3중주곡, 현악기 또는 현악기와 피아노의 조합을 위한 갖가지 4중주곡 및 5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

 

실내음악 양식은 많은 낭만파 작곡가들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독주 피아노 곡이나 리트가 갖는 친군한 개인적 표현의 결핍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관현악 음악의 다채로운 색채와 압도적인 음향을 갖지도 못한 데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골수 낭만주의자들이었던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바그너가 실내음악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19세기 이 매체에 의한 최선의 작품들이 고전적 전통에 가장 가까웠던 작곡가즐 즉,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를 조명해 볼 때 전 생애를 통해 실내악 표현양식에 열심히 도전한 브람스는 교향곡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베토벤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19세기 실내악 작곡가 중의 거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1860∼1870년은 브람스의 합창곡 시대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몇몇 합창곡 중에서 유명한 「독일 레퀴엠」, 「혼성 4중창」, 그리고 「네 손 피아노를 위한 '사랑의 노래'」, 「왈츠집」이 작곡되었다 2백60여곡의 가곡은 그의 실내악과 같이 40여년간에 걸쳐 작곡된 것인데 전반적으로 슈베르트를 모범으로 하고 있으면서 피아노 성부의 역할을 부차적으로 한정시킨 점은 슈베르트나 슈만의 가곡과는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피아노 반주와 비교해 볼 때 브람스의 반주는 덜 회화적이고 묘사적이다. 슈만의 가곡에서와 같은 긴 전주, 후주등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브람스의 가곡은 슈만의 가곡처럼 열렬히 끓어오르며 충동적인 성격보다는 과묵하고 고전적 깊이를 보이며 내성적이고 체념한 듯한 우수를 나타낸다. 오히려 브람스의 낭만주의적 특성은 연애의 주제와 감상적인 분위기에 찬 가사의 선택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가 즐겨 선택한 시의 주제는 '죽음에 관한 명상'으로 「광야의 고독」, 「나는 점점 더 고요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가네」, 「교회의 마당에서」, 「죽음, 그 차디찬 밤 작품 121」(1896)등과 성경 가사에다 노래를 붙인 「네 개의 엄숙한 노래」등은 예술 가곡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준다.

 

말년의 브람스가 지닌 창조력의 배부분은 관현악 어법에 주입되었다. 유명한 작품으로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비극적 서곡」, 「대학 축전 서곡」이 있다. 또,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기교적인 이중 협주곡」과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이 교향곡들은 가고, 실내악, 합창곡등을 통하여 상당히 인정을 받로 난 후의 말년에 쓰여진 곡들로 「교향곡 제1번 다단조」는 그의 나이 43세(1876)때의 작품이며, 최후의 「교향곡 제4번 마단조」는 그의 나이 52세(1885)때 작곡한 것이다.

 

바그너와 리스트의 낭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이 교향곡들은 베토벤의 형식을 게승한 것으로, 19세기 후반의 고전 복구 운동이 압축되어 있다. 고전적 형식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전종적인 4악장 형식에 고전적 기교인 대위법과 동기적 발전이 있다. 또한 특정한 표제가 없다. 이것은 브람스의 실내악 작품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절대음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교향곡들은 그 화성적 어법, 충실하고 다채로운 관현악 음향, 기타 그 음악어법의 일반적인 특징에서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낭만주의의 함정들, 즉 거짓된 웅변, 허황한 기교의 과시 그리고, 자곡가의 머리 속에서 아무런 맥락없이 연결된 생각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음악의 무형식성들을 피아였다. 오직 작곡가의 영감은 어떤 착상이라도 진지하게 사색된 후 최종적인 완성의 형태를 갖추어야만 했다.

 

'형식', '균형', '절도'를 고수한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

브람스가 균형과 절도라는 고전주의자적 원리의 부활에 깊은 관심을 보내고 있음은 그의 창작 활동에서 볼 수 있다. 바그너와 리스트를 대표하는 표제음악 원리라든가 한 악극은 브람스의 창조적 입장이나 기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브람스는 고정주의의 원리를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부분 음악에는 명백히 낭만주의적 색조가 우세하다. 브람스에 있어서 고전성과 낭만성의 대립이라는 이원성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람스의 양식은 베토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악 작품에서 브람스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광애한 음 공간에서 펼쳐지는 보편적 기분이나 정서를 즐겨 표현했다. 브람스의 대규모 형식에서 보여지는 명확한 클라이맥스와 긴장의 해결은 베토벤의 다이내믹한 전개 원리와 매우 공통적으로 보여진다. 낭만주의적 기질은 단조의 사용이라든가, 그의 「교향곡 3번 바장조」첫머리에 보이는 것과 같은 옥타브에 걸친 폭넓은 멜로디, 저음악기를 강조하는 관현악법에서 생기는 어두운 색조 등에서 인지할 수 있다.

 

브람스는 고전주의자로서 형식과 균형과 절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벨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이나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 같은, 신경질적이고 충동적인 기분의 요동과 괴상하고 색다른 표현은 브람스 작품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절도있는 운동과 힘, 전체적인 평정성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의 고전주의적 특징은 소나타 형식의 사용인데 제시부, 전개부, 재현불가는 구성이 고전적인 균형을 나타내고 있다. 하이든이나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브람스도 교향곡에서 2관 편성의 목관악기, 표준적인 금관악기, 팀파니, 통상의 현악기군에 의한 관례적이거나 혹은 고전적인 악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브람스는 베를리오즈나 리스트, 바그너에게서 색채가 풍부라고 기교를 부린 진보적인 관현악 수법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전통적인 관현악법에 따랐다. 그러나 주제를 갖가지 악기에 분재하여 (주제 소재의 대부분을 한 종류의 악기나 악기군에 할당하는 것과는 반대로 '패치워크'중의 관현악법을 만들어 내는 기법은 분명 브람스만의 독자적인 것이다.

 

브람스는 기존형식 가운데서 변주곡을 가장 좋아했다. 변주곡이 자신의 음악적 사고를 표현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의 이런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주제와 변주란 형식만이 제한된 화성 및 선율의 틀 안에서 작곡가로 하여금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감을 독립된 한 작품 내에서 나타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의 변주곡 형식은 주로 피아노 곡에서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피아노 양식은 쇼행의 우아함도, 리스트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웅변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모델은 슈만과 베토벤으로, 그 특징들은 음향의 충실함, 분산화음 음형, 옥타브나 3도, 6도에 의한 설율선의 중복 사용 그리고 당김음, 홀리 리듬 및 기타 이와 유사한 리듬 변형 수법이 많이 사용되는 점이다. 그것은 낭만주의가 풍부한 화성과 따뜻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그 언어는 본질적으로 낭만적이기 보다는 고전적인 기본 관념으로 구축된 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의 많은 작곡가들이 다양한 어법으로 작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 특유의 음악적 특징, 즉 음울하고 조심스럽고 엄숙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개성은 예술가곡,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 등 그가 작곡한 거의 모든 작품에 새겨져 있다.

 

이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자'는 다행히도 '낭만주의적' 19세기에 태어난 음악구성의 노련한 장인이었다. 그는 언뜻 상반되게 보이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의 속성을 자기 음악 가운데 솜시있게 성곡적으로 결합시켜, 옥일 낭만주의의 호화 찬란한 색채로 치장된 고정주의적 형식이라는 훌륭한 혼합은 탄생시켰다.

 

브람스 「도이치 레퀴엠」에 관해

주님의 품에 안겨 죽는 자를 찬미한 독일말로 쓰여진 유일한 레퀴엠

여러 작곡가들에 의하여 작곡된 레퀴엠은 거의 다 카톨릭 의식으로서 라틴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브람스의 '도이치 레퀴엠'은 독일말 번역된 성서를 고스란히 쓰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러면서도 작곡자 자신은 '도이치'. 즉 '독일의'란 말대신에 '세계의'란 말을 바꿔서도 좋다는 뜻을 비춘 것을 보면 세계성을 지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흔히 이 레퀴엠은 브람스가 자기를 몹시도 아껴준 슈만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작곡했다고도 하고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작곡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알고보면 슈만과 어머니가 죽기 이전에 쓰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이 아니고 세계 사람들의 죽음을 위하여 작곡했다고 말할 수 있다.

 

브람스는 크리스찬이 아니면서도 늘 성서를 품에 안고 다닐만큼 어떤 책보다도 아끼며 읽었다고 한다. 오랜 동안 이같이 성서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순전히 신약성서 속의 감명 싶은 구절들에 곡을 붙이게 된 것이다. 어떤 귀족의 죽은 아내를 위한 모짜르트의 레퀴엠이나 아버지의 죽음을 위한 포레의 레퀴엠이 한결같이 미사곡으로서의 라틴말로 되어 있지만 브람스의 이 '도이치 레퀴엠'은 딱딱한 독일말이면서도 죽음을 위한 노래라기보다는 부드러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브람스가 '도이치 레퀴엠'을 발표하자, 누구보다도 깊이 감동하고 기뻐한 사람은 클라라였다.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저는 당신의 '레퀴엠'에 정말 매혹되로 말았습니다. 그 곡이 지닌 이상한 힘은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고야 맙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게 후륭한 작품입니다. 장엄하고 시적인 그 음악에는 사람들을 흥분하게하고 차분히 가라앉게도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란 글월을 보냈다. 제1악장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반드시 위안을 받으리라'(마태복음 5장 4절). '눈물과 함께 시를 뿌리는자는 환희와 함께 거둬들이리라', "씨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나가는 자는 곡식을묶어 가지고 기쁨으로 돌아오리라'(시편 126편 5절 및 6절). 이 악정은 우선 길고 비통한 한탄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은 바이올린이 없는 관현악 때문에 어둡다.

 

그러다가 '환희와 함께 거둬들이리라'라는 절에서 연주되는 하프에 의해 비로소 밝아진다.

 

사람들은 이 악장 속에서 슈베르트의 '물 위의 정령의 노래'와 같은 분위기를 보려고 했으나, 이 정령은 여기서는 슬퍼하는 사람들 위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제2악장 '사람은 모두 풀 같으며 그 영화는 모두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베드로전서 1장 24절). '형제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 보라, 농부는 대지의 귀중한 결실을 앞뒤의 비가 오기까지 참고 기다리노라'(야고보서 5장 7절), '여호와에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노래하며 시온에 돌아왔도다. 그 머리에 영원한 환희를 이고 즐러움과 기쁨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슬픔과 한탄은 달아나리라'(이사야 35정 10절)우선 관현악으로 유명한 '장송 행진곡'이 연주되는 데 이 2박자의 행직곡이 악보에서는 3작자로 적혀 있다. 이 곡은 '사람은 모두 풀과 같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에서 차차 '앞뒤의 비가 오기까지'에로 연주될 때 여기서 플루트와 하프가 협력하여 울리는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 행직곡은 다시 시작되어 힘찬 승리의 합창으로 끝난다. '그들은 마침내 기쁨을 얻으리라. 그리고 그들은 이제 기쁨을 얻었노라!'제3악장 '여호와여, 바라건데 나의 종말과 나의 날이 며칠인가를 알려주시옵소서. 나의 덧없음을 알려주시옵소서', '보라, 그대는 나의 모든 날을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게 하는도다. 나의 목숨은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전성기조차 모두 허무하도다',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음은 그림자와 같도다. 그 걱정하는 일은 모두 허무하도다. 그 모아두는 것은 손에 남아 있는 줄을 모르노라. 주여,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이까. 나의 소망은 그대에게 있노라'(시편 39편 4절∼7절), '그러나 올바른 자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노라'(구약 외전 솔로몬의 지혜 3장 1절).

   바리톤은 고통을 호소하며 이렇게 외친다. '여호와여, 바라건대 나의 종말을 알려주시옵소서. 주여,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니까?' 처음에는 이 부르짖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이 없다. 관현악은 '레'의 흔들리지 않는 보속음의 뒷받침으로 합창을 마지막 선서, 진지한 영혼의 흔들리지 않은 신앙에로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제6악장은 가장 규모가 큰 클라이막스에 해당제4악장 '만군의 여호와여, 그대의 장막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의 영혼은 그지없이 여호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의 마음과 나의 몸은 살아 있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리라. 그대의 집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런 사람은 항상 그를 대칭송하리라'(시편 84편 1,2,4절)'만군의 여호와'라는 가사로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악장은 사랑스러운 진행 때문에 '장막'을 연상케한다. 관현악의 전주에 이어 합창이 올려나오면서 주님의 집에서 사는 행복이 묘사된다. 이윽고 빛을 예상하는 듯이 다시 첫머리의 스타일로 돌아간다.

 

제5악장 '그대들도 지금은 거정이 있도다. 그러니 나는 다시 그대들을 보리라. 그대들은 기뻐하리라. 그 기쁨을 빼앗는 자는 없도다'(요한복음 16장 22절), '나는 잠시 일을 했을 뿐인데, 그처럼 커다란 위안을 주시었도다.'(구약 외전의 벤시라의 지혜 51장 35절),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 나도 그대들을 위로하리라'(이사야 66장 13절)여기에 인용한 최초의 두 가사는 소프라노 독창으로 불리며 세 번째 가사는 합창으로 부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합창의 가사와 독창의 가사에 응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두 가지 가사는 어느 경우와 달리 대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제6악장 '여기에는 영원한 도읍이 없으며 다만 오려고 하는 자를 찾기 때문이리라'(히브리서 13장 14절),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비결을 가르치리라. 우리는 모두 잠드는 것은 아니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모두 한순간에 변하리라', '이 썩은 자는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은 자는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도다', '죽음은 승리에 삼켜졌다고 기록된 말은 성취되리라. 죽음이여, 그대의 바늘은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장 52절∼55절),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능력을 받으심을 당연하도다. 그대는 만물을 만셨고 만물은 그대의 뜻으로 존재하며 또 만들어졌노라'가장 규모가 크게 전개되는 이 악장은 물론 전체의 클라이막스를 형성하고 있다. 클라이막스에서 트럼펫이 작열하는 데서는 다소 바그너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 합창에서 주목되는 것은 헨델도 능가할 만한 깊이와 박력을 지닌 2중 푸가다.

 

제7악장 '이제부터 주님품에 안겨죽는 사람은 북이 있도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멈추고 휴식하리라'이 끝의 악장은 다시 첫머리의 악장과 결부된다. 그것은 빛과 안식과 면죄의 활홀감을 풍겨준다.

 

'도이치 레퀴엠'은 처음에 최초의 3악장만 연주되었는데, 그때에는 리듬과 박자가 들린 팀파니 연주자의 실수 대문에 비인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한편 크게 성공을 거둔 블레멘에서는 곡은 2부로 나뉘어 연주되었다. 이때에는 6악장분이었다. 처음의 4악장과 마지막의 2악장사이에 당시의 관습에 따라요아힘과 그의 아내 아말리에가 헨델과 탈티니와 바하 및 슈만의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이 무렵에 브람스의 어머니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고 있다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다. 브람스는 급히 달려가서 식어가기 시작한 어머니의 손과 아버지의 손을 맞잡게 해주었다. 어머니는 뜨거운 눈불을 흘렸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얼마 후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것은 1865년 2월 2일의 일이다.

 

이때 브람스는 슬픔에 잠긴 채 '도이치 레퀴엠'의 일부를 이루는 구슬픈 선율을 착상했던 것이다. 요아힘은 이 멜로디를 격찬하여 '지극한 효성에 의해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된 고상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Source: http://www.musicschool.pe.kr/musician/brahm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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