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 Chopin, Fryderyk (1810.3.1~1849.10.17) 폴란드

쇼팽 - Chopin, Fryderyk (1810.3.1~1849.10.17) 폴란드

폴란드가 낳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음악에 새롭고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낭만적인 신선한 공기를 흡수하면서 고전 음악의 기반을 착실히 배워 마침내는 피아노 본연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발휘시켰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쇼팽을 그 당시 음악의 중심 도시라 하는 파리에서 후반생을 보내면서 조국의 민족성과 향토색을 세련된 창작 수법으로 작품에 담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새로운 이론과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한 것은 아니지만 외면적으로 고전 음악의 전통을 받아 들여 거기에 그의 예리하고 다감한 음악적 감정을 담아 하나의 시로 변화시킨 것이다. 비할 바 없는 매혹적인 선율에 애수를 담은 음의 구사법은 그의 독자적인 어법이라 할 것이다. 또한 조국의 민속 음악을 예술 음악으로 끌어 올린 그의 공적은 크게 평가받을 만한 것이다.


쇼팽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귀족적이라고 할 만한 폴로네이즈(Polonaise)의 리듬과 농민적이고 대중적인 마주르카(Mazurka) 등의 리듬과 선율이 그의 음악적인 영감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그의 작품은 대개가 즉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꾸밈음과 템포 루바토(Tempo Rubato) 등을 특색으로 하여 시적으로 표현된다. 200여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독주곡과 소품이 많다. 섬세하고 정서적인 그의 곡에는 격정과 애수가 흘러 넘친다.

 쇼팽의 일생을 논하면서 탄생과 죽음의 연도 그의 음악에 대한 간단한 평론등의 식상한 글을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쇼팽의 사랑과 고독'이라는 책을 참조하였으며 이 책은  리스트의  <쇼팽전>, 죠르쥬 상드 <나의 생애>,쇼팽의 수많은 편지들을 참고 하였음을 밝힙니다. 되도록 쇼팽의 많은 부분을 소개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밤을 세워가며 읽었던 쇼팽의 책들은 어떠한 영화보다도 감명 깊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열정은 쇼팽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쇼팽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쇼팽의 사랑과 음악과 삶

 (탄생) 쇼팽은 1810 년 2 월 22일 저녁 폴란드 제라소바 볼라에서 니콜라스 쇼팽과 유스티나 그지자 노프스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누나 와 여동생 둘이 있다. 프레데릭의 어머니 유스티나는 가정의 항상 화목하게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섬세하게 배려하는 자상한 여인이었다. 죠르쥬 상드는 이 어머니를 일컬어 "쇼팽이 진실로 사랑한 유일한 여성'이라고 말한다.   

쇼팽의 가정환경을 보면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들이다. 프레데릭의 성격 형성기에 이것은 강하게 작용하여 그가 여성적 성격을 갖는데 작용했다. 이러한 성격은 프레데릭의 평생의 친구  남성적인 성격이 강한 '티투스'에게 동성애적인 애정을 보이는가 하면 남성같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모성본능을 가진 죠르쥬 상드와의 관계에서도 특이한 애정 생활을 보여준다.

쇼팽가의 자매들은 모두 건강하였는데 유난히 프레데릭의 몸은 늘 집안 식구들의 걱정거리였다. 유년시절 프레데릭은 어머니가 치고 있는 피아노 밑에 기어 들어가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음을 듣고 기뻐하였다. 조금 더 커서는 피아노 건반을 만지며 노느라 혼을 뺏기며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7세부터 지브니 선생님과 피아노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쇼팽이 즉흥 연주를  시작하면 지브니 선생님과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브니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름을 알려져 쇼팽은 상류사회에 드나들게 되었다.

(학창시절)쇼팽은 학창시절 곧잘 만화를 잘 그려 그의 장기였다. 그리고 문학이나 역사에는 몰두했지만 자연과학이나 그리스어 라틴어는 지루해하여 만화만 그렸다고 한다. ^^; Pichon은 쇼팽의 별명이었다.(Chopind을 바꾸면 pichon 이 됨) . 그러나 쇼팽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는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엘스너 선생을 만나게 된다. 엘스너는 3년간 쇼팽을 밑에 두고 가르치게 되는데,이런 기록을 남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 프레데릭 쇼팽 -유능한 학생>, <쇼팽-뛰어난 학생, 2학년 때 건강이 나빠 휴양 여행을 함.>< 쇼팽- 3학년 학생, 위대한 음악적 능력자,  음악의 천재 >...           이후에 그는 독일로 여행을 간다. 그는 베를린 여인들에 대해 ( 그녀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형을 위해 잘려지는 옷감이 가여워 죽을 지경이다. 풍자를 대담하게 하거나 , 야유하는 모습은 특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은 쇼팽의 특징적인 일면으로서 커가면서 점점 짙어지는 경향이다. 독일에서 쇼팽의 연주를 들은 귀족들은 < 내가 살아있는 평생에 쇼팽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 라고 하기도 했다.

1829 년 니콜라스 1세가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왔을 무렵에 파가니니도 도착했다. 쇼팽은 그의 악마적인 영광을 안고 있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이 무렵 그의 < 에튀드> 탄생하였다.  이후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여행을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연주회는 대성공이었으나 , 쇼팽은" 피아노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죽을 힘을 다해 연주 했다. " 라고했다. 전문적인 비평?"바탕체" size="2" color="silver"> 비엔나의 유명한 음악가들은 쇼팽의 재능에 외면적으로는 우정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위험한 경쟁상대로 의식하여 은근히 못마땅해 하였다. 불쌍하고 가엾은 쇼팽... 그는 이내 용기를 잃었다. 그의 소심한 성격 탓에 더욱 실패감을 느꼈다. 그의 고국 친구'맛신스키'에게 이즈음 보낸 편지에는

" 바르샤바에서 내게 그렇게 힘을 주었던 사람에게 찾아가 의견을 물어 그걸 나에게 적어 보내줘. 나는 그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 할꺼야.." 여기에서 그란 쇼팽의 사랑' 콘스탄티아 '이다. 그는 세삼스레 사무치는 여인의 마음은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고통에서 벗어나 매달릴 수 있는 정신적인 대상은 사랑하는 사람 이라는 심정이었다. 쇼팽의 격정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쇼팽의 다른 편지에는 " 파리에 갈 것인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삶이나 죽음이나 내겐 다 같은 것이야 만일 콘스탄티아가 내 생활을 친절히 묻거든 그렇게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줘,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외로워 하고 불행해 한다고 전해줘. 내가 죽고난 뒤에 내 뼛가루는 그녀의 발 아래로 떨어져야 한다고 전해줘..." 그러면서도 쇼팽은 콘스탄티아에겐 직접 말할 용기를 갖지 못했다. "나도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정말 나는 오래 전부터 내 괴로움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있어. "

  이즈음 빈에서는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들이 아닌 평범한 음악가들만이 횡행했다. 이때에는 왈츠가 대성행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빈에서는 왈츠곡 (그의 왈츠곡은 춤을 위한 곡이 아니다. 들어보라..) 몇 개와 마주르카를 썼을 뿐 별로 작곡의 성과는 없었다. 한편 '코스탄티아'와의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맛신스키도 군에 갇다하여 그의 초조감은 날로 더하였다. < 스케르초 D단조 > (작품 20) 은 이런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다. 1831년 7월 20일 빈을 떠남....빈을 떠나 뮌헨을 거치며 그는 그의 통렬한 슬픔의 외침은 'C 단조 에튀드, D 단조 프렐류드에 잘 나타나 있다. 무력감은 A단조 프렐류드에서 나타나고 있다.

(파리에서) 쇼팽은 1831년 파리에 도착했다. 그때 파리의 사정은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높이 평가되고 베를리오즈, 롯시니 등의 유럽 각국의 유명한 예술가가 다 모여 파리는 이때 부터 예술의 도시로 변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칼크브렌너라는 일류 피아니스트인데 그는 쇼팽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3년간 제자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쇼팽의 스승인 엘스너 에 대한 다른 음악가들의 질투였다. 대단한 제자를 두는 것에 대한....쇼팽은 이를 거절 하였으며 그 누가 말하는 것에 기울이지 않고 오페라나 칸타타 교향곡 등을 신경쓰지 않고 오직 피아노에만 열중 하였다.

 연주회들을 통해 찬사를 받고 있던 쇼팽은 그리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콘스탄티아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콘스탄티아는 죽기전에 쇼팽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장님이 되어서야 비로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은 어쨋든 그는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을 꺼야 라고 했다. 1832년즈음에는 쇼팽이 그녀를 잊어갔짐나 1831 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도 그녀를 생각하며 괴로워 한 흔적이 남아있다. " 우리는 언제나 재회하게 될 것인가. 어쩌면 재회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내 건강이 이렇게 나빠져 있으니 말이야.. 나는 내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을 이따금 느끼며 천국같은 평정은 느끼기도 한다. 나는 떠날 수 없는 그림자를 머리속에 그려본다. 그것은 한없이 나를 괴롬히고 있어...

    파리에서 그는 리스트(피아니스트) 와 친하게 지내었다,리스트는 격정의 피아니스트로서 천성의 미모를 가지고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쇼팽과의 정반대의 격정적인 면을 가진 천재가 서로의 본성을 이해하며 친밀하게 사귀게 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쇼팽은 리스트의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 <연습곡 10 번>을 바쳤다. 리스트는 그 작품의 독창성에 감격했다,  이 모든 관계들도 쇼팽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쇼팽의 마음에는 항상 우수 와 고독이 가득했다. 이것이 쇼팽 음악속해서 살아 숨쉬는 특징이다. 쇼팽은 점차 안정되어 갔으며 귀족들은 쇼팽의 실력을 알고 앞을 다투어 그들의 아이를 그에게 맡기었다. 이무렵 쇼팽은 멘델스존 , 하이네 등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사랑 ) 초상화를 보면 포토츠카 부인은 육채가 풍만하고 매혹적으로 보인다. 요염한 매력의 소유자라고 한다. 쇼팽은 포토츠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를 원했다고 하며 그런 희망을 표시하는 것은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다.

리스트는 그의 <쇼팽전>에서 쇼팽은 바깥으로는 예의상 기가 막힌 애교를 보이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면서 진실한 감정은 마냥 감추고 있다.  라고 썼다. 쇼팽은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 그의 아름다운 선율로 그들을 압도하였으면서도 그들을 두려워 했다. " 나는 콘서트를 열고 싶지 않다. 대중들은 나를 두렵게 만들고 있다. 그들의 호흡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그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 때문에 나는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토츠카 부인에 대한 기록 별로 없음...

(또 하나의 사랑) 쇼팽은 드레스덴을 방문했다. 마리아 보진스키 라는 여성은 알토가수 로서 쇼팽의 세 번째 여인이나 쇼팽은 그녀에게 적지 않은 슬픔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 NOCTURN  OP 69. NO. 2 작품 초고에 <마리아양을 위하여> 라고 되어 있으나  < 잊어 버리기 위하여 >라는 작품으로 그녀에게 드레스덴을 떠나온지 1주일 안으로 그녀에게 보내 졌자고 한다.

(죠르쥬 상드)  1836 년 파리에서 리스트와 친구들과 어울리던 쇼팽은 산장에 놀러 갔다가 10년이란 세월을 함계보낸 여인 죠르쥬를 만나게 된다.  쇼팽은 이 여인을 첫인상을 참 안 좋게 보았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있었으며 그걸 본 쇼팽은 '꼴불견'이라고 까지 했다. 그녀는 끊임없는 바람둥이었다.  그러다 쇼팽을 보게 되는데 쇼팽의 나약함은 그녀의 모성본능을 자극하게 되었다. ....

 리스트에 의하면 그녀는 쇼팽에게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부탁했다고 한다. 죠르쥬 상드<나의 생애>를 보면 이 즈음 그녀는 쇼팽과 마리아 와의 관계를 염두해 두고 있다.  상드는 쇼팽을 별장으로도 초대 했었으나 그는 거절해 버렸다. 그 당시 상드가 있던 곳은 '노앙' 이라는 곳인데 상드는 1837년 3 월 쇼팽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왔다. 마리아 와의 단절은 위로해줄 상대가 필요했던 쇼팽은 그녀를 더 이상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상드는 넘치는 성애(性愛)로 그를 위로해 준 것이다.  그해 10월 쇼팽의 건강은 악화 되었다. 상드는 걱정하며 그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건강을 생각하여 상드와 쇼팽은 마조르카 섬이라 불리는 따듯한 섬으로 남쪽으로 갔으나 쇼팽의 병세는 극에 치달았고 사람들은  그들을 멀리했다.  이곳에서 그는 <빗방울 전주곡> < 폴로네즈 c단조> <폴로네즈 a 장조>(작품 40),<발라드 F장오 > (작품38),  완성했다.  

상드는 이때의 쇼팽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 가엷은 대 예술가는 사람들이 멀리하는 환자였다. 그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는 병 속에서 자기의 환상에 불안하게 동요 했으며 ,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신이 들면 억지로 크게 웃어 제치고 작곡한 숭고한 작품을 연주하였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고독과 애수와 공포에 사로잡혀 심장이 찢어 질 듯한 생각으로 작곡한 것이었는데 그는 미친 듯이 쳐대는 것이었다.

1839 년 죠르쥬 상드의 별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 조용한 곳에서 그는 명랑함과 순진성을 다시 되찾았다. 마을 사람들이 쇼팽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 상드를 쇼팽은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다. 상드는 상드 대로 쇼팽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죠르쥬 상드는 문필가였으므로  쇼팽이 작곡을 하며 피아노를 치는 동안 그녀는 글을 썼다.

그당시 상드를 향한 쇼팽의 마음을 보자...  

    : 달콤한 사랑의 말처럼 맑은 나의 음악이 그녀의 곁에 있다. 오로라. 너를 위하여 나는 땅바닥을 기어도 좋다. 무엇을 하든지 너를  위해선 지나치지 않다. 내가 지쳤을 때 너의 눈길이 너의 애무가 너의 미소가 있다면 나는 너를 위해서만 살고 싶다. 너를 위해서만 정다운 음악을 울리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너의 흐린 눈으로 너무 잔혹하게 되어 주지 말어라.

여기서 잔혹하게 되어주지 말어라는 쇼팽의 건강을 우려한 나머지 상드는 그와의 성관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참고 있었던 것이다. 노앙에서 다시 파리로 돌아온 이들은 동거를  했다. 상드는 그를 간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1940년 쇼팽의 음악은 절정기에 달했는데 그것은 상드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 이 때 쇼팽은 상드에게 가진 생각은 이러하다 관계를 갖지 않은 이후 그녀가 내게 주는 것은 모성애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대단한 우정이며 큰 감사이다. 그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이 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의미가 달라져 가고 있었다. 상드는 쇼팽을 <내 어린 애> 로 생각하여 그는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상드가 쇼팽을 보살피고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완전한 사랑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원인은 쇼팽의 병에도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상드가 쇼팽의 병을 악화 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배제 할수 없다.

쇼팽의 집에는 고아한 가구들이 놓여진 방이 많이 있었다.

 

(상드와의 이별)쇼팽과 상드와의 관계는 그동안 쌓여왔던 상드가 그의 병간호에 매우 지쳐갔으며 결정적으로 상드의 딸이 상드의 마음에 안드는 사위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쇼팽이 그의 딸을 돕게 되어...상드의 편지 한 통으로 (이별을 고하는...) 그들은 영원히 이별을 하였다.쇼팽은 그녀를 완전히 떠나려고 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경솔함 그녀의 딸을 꺾어 버리려는 면들을 안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병으로 랗는 쇼팽을 상드 혼자만이 보호하고 도운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혼한 상드를 도와 그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아 주었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많은 작곡료와 레슨비로서 가정을 꾸려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상드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쇼팽이 살아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쇼팽이 많은 면에서 상드에게 도움을 준 ㄱ서은 사실이었다. 정신적인면에서도 쇼팽은 상드의 강렬한 성격에 안정감을 가졌던 반면에, 잔혹한 성격에 예민하고도 연약한 쇼팽의 신경이 많이 손상된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 쪽에서 냉혹한 결별의 선언을 한 것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함께 살고 나서 냉정하게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상드 같은 성격에서나 가능 한 것이지 쇼팽과 같은 연약한 성격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대해 쇼팽은 상드가 자기와 딸을 둘다 귀찮아서 처리하고 싶었던  것으로 새각했다. 1년 후에 그들은 한 번 마주치게 된다. 그 때의 상드의 글을 보면...

 : 그 사람과(쇼팽) 1848 년 3월에 잠깐 만났습니다. 떨며 얼어 붙은 것과 같은 그 사람과 악수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말해주려고 했으나그가 괴로워 할 것을 생각해서 그만 두었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그와 만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1848년 2 월 16일 쇼팽은 파리에서의 최후의 콘서트를 가졌다. 1 주일 전부터 매진이 되었다. 쇼팽은 심한 기침과 발작으로 두려워 했었다. ..  년만에 대중 앞에 선 쇼팽은 자신이 없어했던 것이다. 연주를 하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3 중주곡, 쇼팽의 녹턴 바르카롤라, 에튀드, 프렐류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왈츠 연주 때는 청중들의 갈채가 절정에 도달하여 앙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가 끝나고 쇼팽은 숨이 끊어질 정도로 아팠다. 그 때의 비평가들은...

 요정은 약속을 지켰다. 대단한 성공, 대단한 열연으로 지켜진 것이다. 이 지상에서 비유할 데 없는 그의 연주의 신비성을 말한다는 것은, 그가 받은 환영이나 황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쇼팽은 여행차 영국엘 다녀와서 건강의 최대 위기를 맞는다. 병상에 누워서 끝내 보고 싶어했던 사람은 조르쥬 상드였다..

"다시한 번 만날 수 없을까..?...누구보다 만나고 싶은데...

 상드는  쇼팽이 영국에서 파리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 당신의 친절한 추억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소식을 주세요.라고 편지를 썼으나 쇼팽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던 누이는 그것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만일 쓰다가 만 작품이 발견되거든 불에 태워 없애 버려 주세요. 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내 노력은 깨끗하게 끝을 맺어야 합니다. 헌데 나는 이제 그것은 마저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품을 남겨 두었거나 , 또 그런 작품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니까 나의 이 부탁을 꼭 들어 주세요....

그 옆에서 그의 병세를 듣고 달려온 포토츠카 부인의 눈에서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쇼팽의 죽음) 쇼팽은 마지막으로 무엇이든 음악을 듣기를 원했다. 연주할 사람이 그럼 당신의 소나타를 쳐 드리겠습니다. 쇼팽은 내 것말고 더욱 순수한 음악을..... 내 맥박이 멈추기 전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 주시오.. 라고 했다. 10 월 17일 오전 2시경에 그는 떠

그의 묘비

쇼팽은 별다른 고통 없이 눈을 감았으며, 최후로 이렇게 외쳤다.

"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

 이 뜻은 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는 말이다. 쇼팽의 병은 폐결핵과 후두결핵이라고 진단되었다.

장례식은 그가 사망한 3일 후 20일에 마그레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굉장한 사람들이 나왔다. 저명인사와 이름있는 예술가가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일반 사람들은 3000 여명에 달했다.

장례식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사망한 날 그의 마스크가 떠졌다.  

Source: http://www.musicschool.pe.kr/musician/chop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