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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판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법이 있다. 나보다 강한 놈을 만나면 도망가면 된다. 바로 36계 줄행랑 전법이다. 나보다 강한 상대와
붙으면 지는 것은 당연한 일, 도망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대체
상대가 나보다 강한지 아닌지를 알아야 도망을 가지 않겠는가.
중독자들은 도박의 욕구 앞에 번번이 당하고
만다. 도박에 대한 욕구는 중독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대가 안돼는 강력한 힘이다. 이 힘 앞에서는 자신이
꼼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무서운 줄 알아야 미리 대책을 세우고 도망이라도 칠 수 있지
않겠는가. 36계 전법, 이것이 급성기에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법이다.
“저는 도박을 끊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도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납니다.” 단도박 모임에 나오는 어느 협심자(모임
참석자들은 스스로를 협심자라고 부른다)의 이야기다. 바로 그거다. 이 사람은 그래서 10년간이나 도박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도 도박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니 늘 조심하고 피해야만 한다. 이런
심정으로 10년을 살았기에 도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안 합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히도 거의 대부분 다시 도박의 굴레에 빠진다. 무서운 줄 모르기 때문에 대비를 하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도박 욕구가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그런 때가 올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나는 도박 앞에서
무력함을 시인합니다’ 중독 치료의 12단계 중 첫 번째 나오는 구절이다. 이걸 깨닫는다면 도박 중독 치료의
가장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중독클리닉을 찾은 환자나
단도박 모임의 협심자들을 만나다 보면 책에서 배우지 못하는 생생한 치료법들을 배우게 된다. “차비 좀 빌려
주세요” 도박을 끊은 지 2년이 넘은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차비를 빌려달란다. “아니 당신 사장 아니요?”
머리를 긁적이며 지갑을 열어 보여주는데 지갑이 텅 비어있지 않은가. “만원만 있어도 저는 도박장으로 갈
겁니다. 그래서 지갑에 늘 1000원만 넣고 다닙니다. 오늘은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다보니 차비가
부족해서요”. 얼마나 기발한 전법인가. 어떤 치료법보다도 더 훌륭한 전법을 스스로 깨우친 것이다.
아무리 36계전법에 익숙해도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유혹을 받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게 되면 아무래도 치료에 대한
열정은 식기 마련이다. 이때 반드시 고비가 찾아오는 법이다. 분명 지난 주 까지는 도박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다고 장담하던 청년이 다시 도박을 하고 나타났다. PC 방에 취직해서 일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하고 있었는데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침에 출근하니 손님이 스포츠 신문에 난 경마 기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행히도 주머니에는 어제 입금을 못한 돈 30만원이 고스란히 있었다. 하필 주말만 아니었어도
좋으련만 오늘은 토요일, 바로 경마하는 날이었다.
중독에 빠졌던 사람이 이런 유혹 앞에 견디기는 쉽지가 않다. 우연히 모든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하필 내 앞에서 경마 기사를 읽고, 하필 주머니에 돈이 있고, 하필 그날이 토요일이라니. 그러나
중독자는 미리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예상을 해야만 한다. 막연히 괜찮겠지, 안 가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이때 어떤 전법을 구사할지 아주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익히는 것이 치료의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다.
36계만으로 도박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건 제일 기본적인 전법일 뿐이다. 단지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만사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안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안하고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도박중독의 치료는 단지 도박을 끊는
기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방식을 배우는 마라톤임을 명심해야 한다.
/신영철/강북삼성병원 정신과 교수 - 도박중독 클리닉 입력 :
2006.09.08 14:36 42'
Source: http://health.chosun.com/servlet/base.health.ViewArticle?art_id=20060908000011 |